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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07/10/31 이 땅의 교사는 분노를 모르는가
  2. 2007/10/28 치명적 폭력, 국기에 대한 맹세
  3. 2007/10/25 황금알 낳아야 하는 '닭'
  4. 2007/10/24 이산 정조
  5. 2007/10/22 보행자권리?
2007/10/31 18:00

이 땅의 교사는 분노를 모르는가


[홍세화칼럼] 이 땅의 교사는 분노를 모르는가
홍세화칼럼
한겨레
» 홍세화 기획위원
어린 학생들의 가슴 아픈 죽음이 있었던 학교조차도 아무 일 없었던 듯 경쟁의 일상을 보낸다. 아이들의 설렘과 열정을 용납하지 않는 어른들의 주도면밀한 노력도 바뀌지 않았다. 간간이 들리던 교사의 탄식과 자책도 바쁜 일정에 밀려났다. 눈물어린 조사를 읽던 친구와 책상에 놓인 꽃의 잔상만이 이 사회의 반성을 대신할 뿐이다.

대부분이 자신을 안정적인 직업인으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땅의 교사들은 분노할 줄 모른다. 그리고 ‘교수’ 아닌 ‘교사’라는 명칭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지식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래서 사회와도 자신과도 긴장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아이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더욱 가혹한 경쟁구조에 내몰겠다는 유력한 대선 후보의 목소리에 이처럼 무덤덤할 수가 없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는 아주 솔직하게 노골적으로 부자를 위한 교육정책을 내놓았다. 교육현장이 계급 투쟁의 현장이고, 교육과정이란 계급 계층의 재생산을 합리화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평준화 기조를 허물고 자립형 사립고를 100개로 늘리고, 자율성의 이름으로 대학에 학생선발권을 주겠다고 한다. 한 마디로, ‘부자-승자 독식’ 체제를 구조화하겠다는 것이다.

교사들이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물음이다. 교사들이 만나는 아이들의 삶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크기와 잣대가 바로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자신을 당당한 자유인으로 바라볼 때 학생들을 당당한 자유인으로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교사들은 교사회가 법제화되어 있지 못해 학교 운영상 토론에서도 주체가 되지 못한다. 교무회의에서 교장과 교감의 전달사항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 일상에 길들여진, 대부분이 자유인의 상상력을 잃어버린 존재에 머물러 있다. 기존 체제와 질서에 이처럼 순응하는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자유인의 상상력과 꿈의 날개를 펴도록 돕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들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교사들이 학원 강사보다 못하다는 학생과 학부모의 눈길에 순응하며 행정처리 업무에 쫓기고 있는 현실 …. 안정된 직업인으로 만족하고 있는 듯한 교사들의 자화상이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나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자유인이기를 스스로 거부한 교사들은 사회모순에 맞서 싸우지도 않지만 솔직하지도 않다. 20 대 80으로 양극화된 사회,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각개약진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회에서 구성원을 지배하는 것은 불안이다. 가난한 집안 자식들도 뱁새가 황새 따라가듯 없는 돈에 사교육비를 들여야 하는 것도 이 불안 때문인데, 교사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계층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는 듯 종용함으로써 그들이 ‘88만원 비정규직’을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젠 솔직히 말할 때가 되었다. 이 후보가 솔직했듯이 말이다. 가난한 서민일수록 로또복권에 매달리듯 엷은 가능성에 절망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해법은 다른 데 있다고 솔직히 말해야 한다. 계층 상승의 기회가 닫혀 있다면 그런 사회구조를 혁파하는 길밖에 없다고. 학부모의 불안을 자양분 삼아 안정된 직업인으로서 그 알량한 위치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면 이젠 정녕 분노할 줄 아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홍세화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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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8 18:47

치명적 폭력, 국기에 대한 맹세




사람의 마음은 힘으로 사로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벽돌 찍듯 온 국민의 머릿속을 똑같은 모양으로 찍어 만들어온 국가이기에 이렇듯 종교 활동을 똑같이 강요하는 학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6호] 2007년 10월 22일 (월) 11:13:52 송호창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송호창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된다. 벌건 대낮에 깡패로 보이는 세 남자가 한 사람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다 낡은 스피커에서 사이렌과 함께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흘러나오자 동작을 멈추었다. 패던 사람이나 맞던 사람 모두 가슴에 손을 대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시작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라는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사가 끝나자 세 남자는 다시 한 사람을 쓰러뜨려 짓밟기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했던 사람들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서 금지하는 집단 상해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영화에서나 볼 만한 집단 린치도 놀라웠지만, 정말 강렬한 인상은 그 무서운 사람들도 꼼짝없이 얼어붙게 한 국기에 대한 맹세의 위력이었다. 그 후로 난 매일 오후 6시만 되면 꽁꽁 얼어붙어야 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대광고는 닮은꼴

한동안 잊었던 국기에 대한 맹세가 2007년 6월에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행해지던 것을 국기법 개정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령에 넣어 국민으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지키게 하겠다는 것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조국과 민족이 뭔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까지, 한 치의 의문도 없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짐하게 했던 위정자들에게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국민에 대한 치명적 폭력이다. 물론 행정자치부는 일방 희생을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문구를 삭제한다고는 하지만, 표현을 아무리 순화하더라도 국기에 대한 맹세를 강요하는 이상 그것은 폭력이다. 개인의 양심과 사상에 대한 폭거이고, 충성의 사전적 의미인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성’까지도 국가가 강제하는 것이다. 이런 의무를 법령에 포함시키는 것을 두고 ‘법의 남용’이라고 말한다.

   
 
ⓒ연합뉴스
10월10일, 법원은 강의석 군(위)의 종교와 신앙고백 거부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10월10일에 있었던 판결은 행자부 공무원들이 깊이 새겨둘 만하다. 법원은 종교와 신앙고백을 강요받지 않는 가운데 교육을 받을 권리를 요구하며 저항하다 제적된 강의석군의 항변이 정당하다며, 그에게 손해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내렸다. 강군이 다녔던 대광고는 교육위원회 배정에 따라 자의와 상관없이 입학한 전교생에게 매일 아침 찬송과 기도를 하게 하고, 수요 예배 같은 종교 행사에 의무적으로 참석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종교 활동 태도를 생활기록부에 기록하여 학업 성적에 반영하고, 종교 행사에 불참하는 경우는 불이익을 주거나 체벌까지 가했다.

사람의 마음은 힘으로 사로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번 판결은 종교의 자유, 특정 종교를 강요받지 않을 자유와 교육권의 의미를 되살려주었다는 점에서 헌법과 교육기본법에 의해 기본권을 보호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법은 개인의 기본권을 짓밟기도 하고, 살려주기도 한다. 문제는 그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에게 있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종교 활동을 구성원 모두에게 강제한다는 점에서 국가와 대광고등학교는 너무나 닮았다. 사람의 머리와 가슴속에서 온전히 자신에 의해서만 결정되어야 할 ‘정성’과 ‘종교’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행태가 똑같다. 벽돌 찍듯 온 국민의 머릿속을 똑같은 모양으로 찍어 만들어온 국가이기에, 이렇듯 종교 활동을 똑같이 강요하는 학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경우에 따라 법도 문제가 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법을 운용하고 해석하는 위정자·법관·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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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5 20:54

황금알 낳아야 하는 '닭'



황금알 낳아야 하는 ‘닭’
지금 사회는 인문학더러 상품이 되라고 윽박지른다. 고전에서 게임, 영화 따위의 아이템을 찾아 당장 '문화산업'에 납품하라는 것. 하지만 그것을 다루는 철학과 사상 없이는 백날 해봐야 돈이 안 된다.
[6호] 2007년 10월 22일 (월) 11:17:44 진중권 (중앙대 문과대학 겸임교수·문화평론가)

   
  진중권  

요즘 ‘콘텐츠’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모든 것을 화폐로 환원시키는 사회는 문화마저 산업으로 만들어버렸다. 오늘날 한국에서 문화는 곧 산업이며, 산업 아닌 문화는 문화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만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어놓는 미다스의 손은 문화마저 황금으로 바꾸어놓는다. 대중은 이 변성의 마술에 열광한다.

문화산업이라는 말은, 인문학더러 콘텐츠라는 이름의 ‘황금알’을 낳는 닭이 되라는 것이다. 황금알을 안 낳으면 모이도 안 줄 태세다. 황금알을 못 낳는 닭은 ‘대한 양계장’에 살 자격이 없다. 그런 닭들은 머잖아 대량으로 살(殺)처분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문학은 목하 생존을 위해 달걀을 황금알로 변성시키는 연금술 학습을 받고 있다. 왜들 그러는 걸까?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머리 앞에서 진정한 인문정신을 떠드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인문학의 가치마저도 돈으로 환산해줘야 비로소 이해를 한다. 그러니 ‘문화의 산업화가 인문 정신의 타락’이니 어쩌니 푸념하기보다, 차라리 지금 이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의 산업화가 결국 돈도 못 벌어줄 거라 얘기하는 게 효과적이다.

문화를 오로지 산업으로만 간주하는 천박함. 그것은 애초에 문화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모든 것의 가치를 오로지 돈으로 재는 사회에는 문화란 게 있을 수 없다. 문화란 돈 버는 수단에 관한 노하우가 아니라, 돈 버는 목적에 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성찰 없는 사회에 문화가 없다. 문화가 없으면, 상품화를 할 수도 없으니 당연히 돈도 못 번다.

사회는 인문학에 상품이 되라고 요구한다. 상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은 쓸모없으며, 상품이 되어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고 윽박지른다. 이른바 ‘문화산업’이 지금 인문학에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고전을 뒤져서 게임의 소재가 될 만한 것, 영화의 줄거리가 될 만한 것, 디지털 정보 산업의 아이템이 될 만한 것을 찾아서 즉시 문화산업에 납품하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얘기되는 ‘콘텐츠’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위한 ‘소재’라는 의미에 가깝다. 거기에 대충 영상 테크닉만 결합하면 된다는 투다. 하지만 같은 소재를 다루어도 수준이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소재를 처리하는 미학적 능력, 그것을 해석하는 철학적 이해다.

   
 
ⓒ난나 그림
 
 
그림 솜씨 뛰어난 한국 애니, 왜 세계 시장에서 실패 거듭하나

일본과 한국의 애니메이션을 비교해보자.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도 종종 한국에서 이루어진다고 들었다. 적어도 그림 솜씨만은 한국도 일본 못지않다. 게다가 한국이 어디 납품할 소재거리가 부족하던가? 그런데 왜 한국에서 직접 만든 애니메이션은 세계 시장에서 실패하는가? 그때마다 지적되는 것이 바로 서사와 주제의식의 부재. 한마디로 인문학이 없다는 얘기다.

철학과 사상 없이는 만화영화도 제대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당장 써먹을 소재나 채굴해 바치라고 요구할 때, 인문학은 철학과 사상을 갖출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랜 숙고와 성찰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 진행되는 이른바 ‘콘텐츠 사업’이라는 것은 황금알을 얻기 위해 곯은 달걀에 금칠하는 것에 가깝다.

한국 영상산업의 가장 큰 문제는 ‘문학’의 부재. 이는 납품할 소재의 가짓수를 늘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영상산업에 필요한 인문학적 교양의 깊이를 갖추는 것은, ‘인문학이란 굳이 황금알을 낳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흔쾌히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닭은 황금알을 낳을 수 없다. 하지만 닭이 낳은 알을 나중에 황금으로 바꿀 수는 있다. 인문학이라는 닭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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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4 00:13

이산 정조



이산 정조를 보면서 들은 생각.

사도세자를 지아비로 둔 팔자로 왕위계승시 생존을 위협당할 영조때의 공신들로부터 갖은 모략과 계책에 시달리고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불운의 왕.

정조가 영조의 대를 이어 펼쳐나갔던 탕평책은 정조를 빛나게 하는 정책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자기자신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불안한 분위기는 왕권강화의 끈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게 함으로써 근대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쓰나미에 강타를 당하고 좌초하고 만다.

본방사수한 한성별곡으로 영정조시대의 기운을 이어받은 나...
열렬히 정조 시대를 살피고 만다.

그리고 어설픈 '왕과 나'를 과감히 버리고 '이산'에 올인하려 하나..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매번 순위를 '곤히잠'이란 녀석에게 빼앗기고 만다..하.


티스토리에 끄적거리는 재미에 불타오르는 글쓰고자하는 열정.
많이 주변인들에게 권장하며 광고하고 다니지만...
성과는 아직 하나도 없다.

좋은 건 함께 나누자는 신조로 살아가는 나이기에
인터넷의 사적 공간. 블로그의 매력에 옴빵 빠져보라고 이 연사 히임..차게 외치입니다아!!!


블로그의 이원화로 활동의 획을 어디에 굵게 그어야 하나를 고민중이지만
그래도 나를 나이게 한 최초의 블로그 '스톤라디오'
옆의 '고양이 없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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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2 20:25

보행자권리?

요즘 보행자에 대한 권리주장이 새삼 고개를 들면서,
차를 운전할 때, 아무 생각없이 보행자에게 혀를 끌끌 차던 습관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겁도 없이', '왜 저리 안 비키는 거야' 등
생각없이 내뱉는 말이 나의 의식을 규정한다. 쯧쯧.

최근 한 글에서 멋진 내용을 퍼온다.



 
   
 

"서울시 횡단보도 신호등 점멸 시간이 정상인의 보폭 시간에 맞추어져 있어 노인들이나 어린이, 그리고 장애인들은 종종 걸음을 쳐 길을 건너야 하고 그 때문에 사고가 많이 난다고 한다.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횡단보도가 오히려 사회적 약자에게는 보행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고 위협하는 셈이다.

따라서 문제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쌩하니 달려버리는 매정한 운전자들이 아니다. 애초부터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고 적용할수록 사회적 약자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차량 중심의 법, 혹은 규칙 자체이다....어쩌구저쩌구"

"어쩌구저쩌구.... 비유하자면 신호등 불이 바뀌더라도 누군가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으면 기다리는 것이 법에 위한 통치이고, 신호가 바뀌었으니 쌩하니 달려 버리는 것이 철권통치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국회와 정부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달려버리는 자가용이다. 대표적으로 비정규직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다. 홈에버 사태에서도 볼 수 있듯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고 만든 법이 시행되자마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는 사태만 불러일으켰다. 법을 엄정하게 집행할수록 법이 보호하려고 하던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고통받고 있다. 지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법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법을 만든 정부와 국회가 한다는 일이 어처구니없게도 고작 법의 허점을 악랄하게 이용했다고 사용주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뿐이다. 법 자체에 대해서는 악법도 법이라며 느닷없이 수많은 지식인과 정치인이 ‘나는 소크라테스의 후예’란다.

그 와중에 사용주는 법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빠져나가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 다른 ‘법’의 엄정한 집행을 통해 줄줄이 감옥으로 끌려가고 있다. 이들을 응원하며 신문 칼럼을 쓴 지식인, 심지어 개그맨도 명예훼손이라는 이름으로 법의 엄정한 심판대로 끌려가고 있다. 법은 자신들이 만들어놓고 그 책임은 남들에게 다 떠넘기고 있다. 스스로 악법에 따라서 책임을 지고 독배를 마실 생각은 전혀 없는 듯하다. 보행자 중심으로 횡단보도 신호 체계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왜 애초부터 방구석에 처박혀 있지 길거리에 나왔냐고 장애인을 욕하는 셈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소크라테스들이 이해하는 법에 의한 지배이다. "


이 글을 읽으며 나의 보행자에 대한 철권통치에 종말을 고함을 선언하노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블로그에 끄적그리는 재미 쏠쏠하군..
좀 더 땡겨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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